94년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해다. 바로 지금의 약혼녀 (김)미순 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방황을 했었고 도망도 많이 갔다. 6월에 도망을 갔다가 돌아온 직후 나와 동갑내기인 (황)영조가 "기분을 풀어 주겠다"며 정봉수 감독님께 얘기를 하고 함께 여행(?)을 떠났다. 부산에서 며칠 있다가 영조의 고향인 삼척시 근덕면으로 옮겼다.
영조가 친구와 그 애인, 애인의 친구를 불러냈다. 바로 그 친구의 애인의 친구가 당시 삼척의료원에 간호사로 있던 미순 씨였다.
잊지도 않는다. 6월5일이었다. 처음 본 순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근덕면 덕산리의 미순 씨 집에서 차 한 잔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그대로 헤어질 순 없었다. 마침 다음날(음력 4월27일)이 미순 씨 생일이었기 때문에 생일파티를 해주겠다고 했고, 같이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노래방에서 블루스도 추었다.
선물로 목이 빙 돌아가는 인형을 선물했는데 지금쯤은 아마 목이 부러졌을 거다.
방황을 털고 돌아온 후 얼마 있다가 "사귀고 싶다"고 전화를 했는데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
그러더니 얼마 후 "친구로 지내자"고 전화를 걸어와 실망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95년부터였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기간이었는데 미순 씨와 연락도 닿지 않으니 더욱 의기 소침할 수 밖에. 당시 경주에서 훈련 중이었는데 영조 친구가 놀러 왔다가 침울한 내 모습을 보고 미순 씨에게 전화를 해서 오라고 했다.
경주로 온 미순 씨는 힘들어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경주를 떠날 때 "자주 연락하세요"라고 했고 본격적으로 사귀게 됐다.
하지만 좋지 않은 일도 생겼다. 지난 3월 돌아가신 아버님이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이 95년이었다. 충격이 컸다. 얼마 사시지 못할 거란 얘기를 듣고 미순 씨를 부모님께 인사시켰다. '며느리 후보가 이렇다'고 보여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내가 결혼하는 걸 못보고 돌아가셔서 너무 죄송스럽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이 열린 해였다. 그 해 3월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8분26초로 2위를 차지하며 올림픽 대표로 선발됐다.
올림픽 출전은 내 최대의 꿈이었고 목표였다. 이전까지 '올림픽에 출전하고 한 1억원만 모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군 복무가 마음의 부담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우리 나이로 27세였으니 뒤늦게 군대에 가야 한다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올림픽에서 나는 남아공의 조슈아 투과니에 이어 은메달을 따냈다. 국민들로서는 금메달을 못 딴 게 아쉬웠겠지만 평생 올림픽을 목표로 해 온 나로서는 너무 기뻤다. 당시 내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며 골인하는 것을 보고 어떤 분이 물었다.
"은메달도 장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군 면제된 것 때문이 아닌가"라고.
솔직히 말씀 드리면 맞다. 한창 뛰어야 될 나이에 군에 입대하면 몇 년간 마라톤을 잊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군 면제 사실이 너무 기뻤다. 또 미순씨랑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기뻤던 이유 중 하나였다.
97년은 부진했던 해다. 발목이 좋지 않아 경부역전 마라톤 외에는 별로 내세울 기록이 없었다.
98년은 로테르담 마라톤에 출전했다. 로테르담은 코스가 좋아 기록이 많이 나오는 대회였다.
당시 정봉수 감독님은 "가지 말라"고 했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오기 같은 게 생겨서 출전을 강행했다. 주위에서도 별 기대를 안 했지만 훈련량이 많아서 그랬는지 기록이 잘 나왔다(2시간7분44초로 한국최고기록 경신).
그 해 겨울에는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내 최고의 해를 보냈다.
당시 팀 후배 (김)이용(현 상무)이도 컨디션이 좋았는데 훈련 막판 감기로 컨디션이 떨어져 좋은 성적을 못 내고는 굉장히 아쉬워했다.
99년. 내 마라톤 인생에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는데...
1999년 4월, 나는 런던마라톤에 나가기로 결정됐다. 팀 후배인 권은주가 여자부에 나섰다. 그런데 당시 도저히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고 느꼈다.
몸도 좋지 않았고.. 하지만 코오롱 정봉수 감독님은 내가 마무리 훈련 때 보여준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나가 보자고 하셨다.
결국 성적이(12위) 별로 좋지 못했고 감독님도 실망하셨다. 반면 같은 날 로테르담에 출전한 후배 김이용(현 상무)은 2시간7분49초의 역대 2위 기록을 세워 주목을 받았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김)이용이는 1년 전 내가 로테르담에서 기록한 성적과 다를 게 없는데 팀에서의 대우가 너무 차이가 나서 불만이 쌓였다.
옆에서 보는 나로서도 괴로웠다. 하지만 팀에서는 '기록은 좋지만 순위가 처져(나는 당시 2위, 이용이는 5위였다) 회사 규정상 이봉주와 같은 대우를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8월께 이용이가 군 입대를 선언했고 또한 설상가상으로 팀 코칭스텝의 개편작업이 너무 객관적이지 못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나는 선배로서 별로 해줄 게 없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워 팀을 떠나게 됐다.
다른 남녀 선수들도 함께 팀을 떠나기로 해 코오롱 마라톤팀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게 된 이 사건이 바로 그 해 9월 '코오롱 사태'의 발단이었다.
결국 팀이 사실상 해체되다시피 했고 나도 20여일 만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게 됐기 때문에 한동안 정신적인 충격으로 마음의 갈피를 좀체 잡지 못했다.
그리고 10월 중순께부터 임상규, 오인환 코치님, 손문규, 권은주, 오정희 등 과 함께 충남 보령 여관방에서 자며 거친 음식을 먹어 가며 힘겨운 훈련을 해야 했다.
당시 '이대로 내 마라톤 인생은 끝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던게 솔직한 심정이다.
해를 넘긴 2000년 2월, 도쿄마라톤에 출전했다. 시드니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야 했지만 무엇보다 '코오롱에서 큰 선수가 이유야 어쨌든 팀과 감독을 버리고 떠나 잘 되겠느냐'는 주위의 시선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만약 그 대회에서 실패했다면 나는 운동화를 벗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직 운이 나에게 따랐는지 또다시 한국 최고기록(2시간7분20초)을 세웠고 함께 출전한 (백)승도형(한전ㆍ2시간8분52초)도 자신의 최고기록을 세우는 겹경사를 누렸다.
그날 저녁 오인환 코치님과 정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평생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은 없었다.
소속팀 없이 지내던 나는 2000년 6월 2일 창단한 삼성전자 육상단에 입단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함께 코오롱을 떠났던 코치님들과 동료 3명이 입단해 편히 운동을 하게 됐다.삼성은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국제적인 팀으로 내가 운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했다. 자신감도 생겼고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
시드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기 위해 한눈 팔지 않고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장소를 옮기며 땀을 흘렸다.
드디어 운명의 날인 10월 1일이 왔다. 바람도 많이 불었고 난코스였지만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선두권에 붙어 달리다 17~18㎞ 지점에서 다른 선수와 충돌하며 넘어지고 말았다. 다리가 풀렸다. 다시 이를 악물고 뛰었지만 역부족이었다.
24위. 당시 한국선수단 성적이 부진해 나에게 기대가 컸던 국민들이 상당히 실망했던 것으로 안다.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훈련을 했는데.. 보스턴마라톤까지 25번의 대회 중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가장 많은 훈련을 소화했다.
그게 아쉬워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무리한 출전'이라는 주위의 우려를 무릅쓰고 후쿠오카마라톤에 출전했고 2위를 차지하며 어느 정도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꿈같은 보스턴 우승이 이어졌던 것이다.
오늘날의 내가 있기까지 도와준 고마운 분들이 정말 많다.
부모님에 대한 마음도 남다르다. 5년 남짓 투병 끝에 내가 잘되는 걸 못 보고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도 나지만 특히 어머니를 떠올리면 눈물이 절로 날 것 같다.
우리 어머니처럼 힘들게 사신 분도 없을 것이다. 집에 있는 시간도 얼마 안됐고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한 게 너무 죄송하다. 내년에 결혼할 예정인데 그 뒤에는 좋은 아들이 되겠다.
선수생활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로 생각하고 있다. 은퇴하기 전에 세계최고기록에 도전할 계획이며 은퇴한 뒤에는 선수생활의 경험을 충분히 살려 좋은 지도자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당시 나는 방황을 했었고 도망도 많이 갔다. 6월에 도망을 갔다가 돌아온 직후 나와 동갑내기인 (황)영조가 "기분을 풀어 주겠다"며 정봉수 감독님께 얘기를 하고 함께 여행(?)을 떠났다. 부산에서 며칠 있다가 영조의 고향인 삼척시 근덕면으로 옮겼다.
영조가 친구와 그 애인, 애인의 친구를 불러냈다. 바로 그 친구의 애인의 친구가 당시 삼척의료원에 간호사로 있던 미순 씨였다.
잊지도 않는다. 6월5일이었다. 처음 본 순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근덕면 덕산리의 미순 씨 집에서 차 한 잔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그대로 헤어질 순 없었다. 마침 다음날(음력 4월27일)이 미순 씨 생일이었기 때문에 생일파티를 해주겠다고 했고, 같이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노래방에서 블루스도 추었다.
선물로 목이 빙 돌아가는 인형을 선물했는데 지금쯤은 아마 목이 부러졌을 거다.
방황을 털고 돌아온 후 얼마 있다가 "사귀고 싶다"고 전화를 했는데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
그러더니 얼마 후 "친구로 지내자"고 전화를 걸어와 실망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95년부터였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기간이었는데 미순 씨와 연락도 닿지 않으니 더욱 의기 소침할 수 밖에. 당시 경주에서 훈련 중이었는데 영조 친구가 놀러 왔다가 침울한 내 모습을 보고 미순 씨에게 전화를 해서 오라고 했다.
경주로 온 미순 씨는 힘들어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경주를 떠날 때 "자주 연락하세요"라고 했고 본격적으로 사귀게 됐다.
하지만 좋지 않은 일도 생겼다. 지난 3월 돌아가신 아버님이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이 95년이었다. 충격이 컸다. 얼마 사시지 못할 거란 얘기를 듣고 미순 씨를 부모님께 인사시켰다. '며느리 후보가 이렇다'고 보여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내가 결혼하는 걸 못보고 돌아가셔서 너무 죄송스럽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이 열린 해였다. 그 해 3월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8분26초로 2위를 차지하며 올림픽 대표로 선발됐다.
올림픽 출전은 내 최대의 꿈이었고 목표였다. 이전까지 '올림픽에 출전하고 한 1억원만 모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군 복무가 마음의 부담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우리 나이로 27세였으니 뒤늦게 군대에 가야 한다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올림픽에서 나는 남아공의 조슈아 투과니에 이어 은메달을 따냈다. 국민들로서는 금메달을 못 딴 게 아쉬웠겠지만 평생 올림픽을 목표로 해 온 나로서는 너무 기뻤다. 당시 내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며 골인하는 것을 보고 어떤 분이 물었다.
"은메달도 장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군 면제된 것 때문이 아닌가"라고.
솔직히 말씀 드리면 맞다. 한창 뛰어야 될 나이에 군에 입대하면 몇 년간 마라톤을 잊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군 면제 사실이 너무 기뻤다. 또 미순씨랑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기뻤던 이유 중 하나였다.
97년은 부진했던 해다. 발목이 좋지 않아 경부역전 마라톤 외에는 별로 내세울 기록이 없었다.
98년은 로테르담 마라톤에 출전했다. 로테르담은 코스가 좋아 기록이 많이 나오는 대회였다.
당시 정봉수 감독님은 "가지 말라"고 했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오기 같은 게 생겨서 출전을 강행했다. 주위에서도 별 기대를 안 했지만 훈련량이 많아서 그랬는지 기록이 잘 나왔다(2시간7분44초로 한국최고기록 경신).
그 해 겨울에는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내 최고의 해를 보냈다.
당시 팀 후배 (김)이용(현 상무)이도 컨디션이 좋았는데 훈련 막판 감기로 컨디션이 떨어져 좋은 성적을 못 내고는 굉장히 아쉬워했다.
99년. 내 마라톤 인생에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는데...
1999년 4월, 나는 런던마라톤에 나가기로 결정됐다. 팀 후배인 권은주가 여자부에 나섰다. 그런데 당시 도저히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고 느꼈다.
몸도 좋지 않았고.. 하지만 코오롱 정봉수 감독님은 내가 마무리 훈련 때 보여준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나가 보자고 하셨다.
결국 성적이(12위) 별로 좋지 못했고 감독님도 실망하셨다. 반면 같은 날 로테르담에 출전한 후배 김이용(현 상무)은 2시간7분49초의 역대 2위 기록을 세워 주목을 받았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김)이용이는 1년 전 내가 로테르담에서 기록한 성적과 다를 게 없는데 팀에서의 대우가 너무 차이가 나서 불만이 쌓였다.
옆에서 보는 나로서도 괴로웠다. 하지만 팀에서는 '기록은 좋지만 순위가 처져(나는 당시 2위, 이용이는 5위였다) 회사 규정상 이봉주와 같은 대우를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8월께 이용이가 군 입대를 선언했고 또한 설상가상으로 팀 코칭스텝의 개편작업이 너무 객관적이지 못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나는 선배로서 별로 해줄 게 없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워 팀을 떠나게 됐다.
다른 남녀 선수들도 함께 팀을 떠나기로 해 코오롱 마라톤팀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게 된 이 사건이 바로 그 해 9월 '코오롱 사태'의 발단이었다.
결국 팀이 사실상 해체되다시피 했고 나도 20여일 만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게 됐기 때문에 한동안 정신적인 충격으로 마음의 갈피를 좀체 잡지 못했다.
그리고 10월 중순께부터 임상규, 오인환 코치님, 손문규, 권은주, 오정희 등 과 함께 충남 보령 여관방에서 자며 거친 음식을 먹어 가며 힘겨운 훈련을 해야 했다.
당시 '이대로 내 마라톤 인생은 끝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던게 솔직한 심정이다.
해를 넘긴 2000년 2월, 도쿄마라톤에 출전했다. 시드니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야 했지만 무엇보다 '코오롱에서 큰 선수가 이유야 어쨌든 팀과 감독을 버리고 떠나 잘 되겠느냐'는 주위의 시선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만약 그 대회에서 실패했다면 나는 운동화를 벗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직 운이 나에게 따랐는지 또다시 한국 최고기록(2시간7분20초)을 세웠고 함께 출전한 (백)승도형(한전ㆍ2시간8분52초)도 자신의 최고기록을 세우는 겹경사를 누렸다.
그날 저녁 오인환 코치님과 정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평생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은 없었다.
소속팀 없이 지내던 나는 2000년 6월 2일 창단한 삼성전자 육상단에 입단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함께 코오롱을 떠났던 코치님들과 동료 3명이 입단해 편히 운동을 하게 됐다.삼성은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국제적인 팀으로 내가 운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했다. 자신감도 생겼고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
시드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기 위해 한눈 팔지 않고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장소를 옮기며 땀을 흘렸다.
드디어 운명의 날인 10월 1일이 왔다. 바람도 많이 불었고 난코스였지만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선두권에 붙어 달리다 17~18㎞ 지점에서 다른 선수와 충돌하며 넘어지고 말았다. 다리가 풀렸다. 다시 이를 악물고 뛰었지만 역부족이었다.
24위. 당시 한국선수단 성적이 부진해 나에게 기대가 컸던 국민들이 상당히 실망했던 것으로 안다.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훈련을 했는데.. 보스턴마라톤까지 25번의 대회 중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가장 많은 훈련을 소화했다.
그게 아쉬워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무리한 출전'이라는 주위의 우려를 무릅쓰고 후쿠오카마라톤에 출전했고 2위를 차지하며 어느 정도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꿈같은 보스턴 우승이 이어졌던 것이다.
오늘날의 내가 있기까지 도와준 고마운 분들이 정말 많다.
부모님에 대한 마음도 남다르다. 5년 남짓 투병 끝에 내가 잘되는 걸 못 보고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도 나지만 특히 어머니를 떠올리면 눈물이 절로 날 것 같다.
우리 어머니처럼 힘들게 사신 분도 없을 것이다. 집에 있는 시간도 얼마 안됐고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한 게 너무 죄송하다. 내년에 결혼할 예정인데 그 뒤에는 좋은 아들이 되겠다.
선수생활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로 생각하고 있다. 은퇴하기 전에 세계최고기록에 도전할 계획이며 은퇴한 뒤에는 선수생활의 경험을 충분히 살려 좋은 지도자가 되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