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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코(瀨古)감독, 지도자로서 올림픽 재도전!!
게시일 : 2003-12-29 | 조회수 : 5,102
제자 쿠니치카(國近)가 아테네행 확정
세코(瀨古)감독, 지도자로서 올림픽 재도전!!
세 사람의 경쟁에서 우승을 하면서 단숨에 아테네 올림픽 대표선수의 티켓에 한발 다가선 쿠니치카 토모아키(에스비 식품). 현역시절 1980년대 모스크바의 "환상의 대표"를 포함해서 3번의 마라톤 올림픽 대표 선수였던 세코 토시히코(瀨古理彦) 감독. 이번의 결정으로 아테네 올림픽 대표선수 자리에 거의 확정인 쿠니치카는 세코 감독이 키운 첫 마라톤 올림픽 대표 선수이다.
감독취임 15년 만에 이룬 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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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치카의 인터뷰가 끝나고 이어서 세코 토시히코 감독의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서 세코 감독은 툭 툭 한마디씩 말을 했다.
「제가 선수였을 때보다도 더 기쁩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것으로 감독이 된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마라톤에서 올림픽 대표선수를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트랙경기에서는 힘듭니다. 아프리카 선수들과는 소질이 달라서 이길 수 없습니다. 마라톤이라면 승부를 겨뤄 볼 기회는 있습니다.」
올림픽 타이틀만은 없었지만 에스비 식품의 세코 감독은 1980년대 한 세대를 풍미했다. 최고의 전성기에는 국내에서 만이 아니라 안정된 주법과 강렬한 라스트 킥을 무기로 해외에서도 연승. 이름만으로도 외국인 선수가 중압감을 느낀다. "세계의 세코" 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생각처럼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에스비 식품은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실력이 뛰어난 선수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각각의 선수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지도자가 하는 말이 좀처럼 먹히지 않는다. 감독의 생각을 선수에게 전달 할 수 없다. 마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노하우를 전달할 수도 없다. 현역시절의 라이벌로 아사히카세(旭化成)를 지도하고 있는 소 다케시(宗茂), 시게루(猛) 형제에게 실적에서 뒤지고 있다. 선수의 세대교체도 진행되고 있으며 감독 자신도 선수와 연령차이가 있다.
그 속에서 선수들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는 기술도 생겼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고 강행하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것도 감독의 기술 중의 하나. 감독으로서의 경력를 쌓는 동안에 보이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다.
[결과에 굶주려 있던 쿠니치카가 세코주의의 답습으로 획득하게 된 큰 수확]
그러한 상황 속에서 쿠니치카가 NTT 서일본에서 이적해 온 것은 2000년도이다. 2001년에는 부상의 원인인 O자형 다리의 수술. 쿠니치카 본인도 세코 감독 이상으로 결과를 내고 싶었다. 4년 전의 이 대회에서 2시간10분10초를 내면서 일본 선수 3번째인 6위로 입상. 그 후에 2시간10분을 마크하면서 세계기록에 도전하기 위해 다시 한번 결심을 했다.
「마라톤에 전념하고 싶다. 그것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뜻대로 연습을 하고 싶다.」
쿠니치카는 스스로의 희망으로 3년 전 에스비 식품으로 이적해 왔다. 그 후에 육상부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 결정되었지만 당시의 이 선택은 NTT 서일본 육상부 관계자에게 있어서 결코 기분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반대를 물리치고 스스로 새로운 환경을 선택한 이상 변명은 있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결과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부상도 있었지만 다시 일어서서 좋은 컨디션으로 임했던 2002년의 후쿠오카 국제마라톤은 실패로 끝났으며 2시간15분19초의 좋지 않은 기록으로 8위에 그쳤다. 설욕을 노리고 3개월 후에 출전한 03년 비와코에서도 2시간10분48초로 8위. 본인의 최고 기록은 NTT 서일본 시절과 똑같다.
30살. 이제 결과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세코 감독은 이번에는 지금까지의 쿠니치카와 달랐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차분했습니다. 지난번에는 10일 정도 전부터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적한 것도 있어서 결과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초조함도 있었던 것 같지만 이번에는 본인이 자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실패한 경험을 살린 것 같습니다. 쿠니치카는 제가 말하는 것을 잘 들어주며 저도 생각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전 대회의 실패는 마지막 조정이 빨라서 레이스에서는 최고의 컨디션이 지났던 것에 원인이 있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이번에는 4주 전부터 1주일 정도 미야자키에서 합숙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곳에서 전력을 다해서 달리는 것으로 의식적으로 마지막 조정을 늦출 수가 있었다. 그리고 레이스에서의 작전에 대해서도 선수는 감독의 지시를 따른다.
「40km 까지는 욕심을 내지 말아라. 쓸데없는 힘을 사용하지 말고 앞에 나가지 말아라. 만약에 40km까지 따라가서도 여유가 있다면 욕심을 내어서 승부를 걸어라.」
현역시절 항상 마지막에 승부를 내었던 감독의 전법을 선수에게 전수하고 있다. 쿠니치카는 그대로 레이스를 했다. 그것이 아테네 올림픽 대표선수의 티켓으로 이어졌다. 앞으로 8개월 정도 연습을 할 수 있다.
감독은 현역시절 올림픽에서 정상에 설 기회가 3번 있었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는 일본의 보이콧으로 "환상의 대표"가 되었으며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는 조정에 실패,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연습 때부터 페이스가 올라가지 않아서 실전 경기에서는 승부를 낼 기술이 없었다. 3번의 기회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올림픽의 한을 풀 기회를 겨우 잡은 것이다. 세코 감독과 쿠니치카의 올림픽 여정이 지금 시작되었다.
세코(瀨古)감독, 지도자로서 올림픽 재도전!!
세 사람의 경쟁에서 우승을 하면서 단숨에 아테네 올림픽 대표선수의 티켓에 한발 다가선 쿠니치카 토모아키(에스비 식품). 현역시절 1980년대 모스크바의 "환상의 대표"를 포함해서 3번의 마라톤 올림픽 대표 선수였던 세코 토시히코(瀨古理彦) 감독. 이번의 결정으로 아테네 올림픽 대표선수 자리에 거의 확정인 쿠니치카는 세코 감독이 키운 첫 마라톤 올림픽 대표 선수이다.
감독취임 15년 만에 이룬 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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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치카의 인터뷰가 끝나고 이어서 세코 토시히코 감독의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서 세코 감독은 툭 툭 한마디씩 말을 했다.
「제가 선수였을 때보다도 더 기쁩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것으로 감독이 된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마라톤에서 올림픽 대표선수를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트랙경기에서는 힘듭니다. 아프리카 선수들과는 소질이 달라서 이길 수 없습니다. 마라톤이라면 승부를 겨뤄 볼 기회는 있습니다.」
올림픽 타이틀만은 없었지만 에스비 식품의 세코 감독은 1980년대 한 세대를 풍미했다. 최고의 전성기에는 국내에서 만이 아니라 안정된 주법과 강렬한 라스트 킥을 무기로 해외에서도 연승. 이름만으로도 외국인 선수가 중압감을 느낀다. "세계의 세코" 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생각처럼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에스비 식품은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실력이 뛰어난 선수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각각의 선수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지도자가 하는 말이 좀처럼 먹히지 않는다. 감독의 생각을 선수에게 전달 할 수 없다. 마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노하우를 전달할 수도 없다. 현역시절의 라이벌로 아사히카세(旭化成)를 지도하고 있는 소 다케시(宗茂), 시게루(猛) 형제에게 실적에서 뒤지고 있다. 선수의 세대교체도 진행되고 있으며 감독 자신도 선수와 연령차이가 있다.
그 속에서 선수들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는 기술도 생겼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고 강행하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것도 감독의 기술 중의 하나. 감독으로서의 경력를 쌓는 동안에 보이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다.
[결과에 굶주려 있던 쿠니치카가 세코주의의 답습으로 획득하게 된 큰 수확]
그러한 상황 속에서 쿠니치카가 NTT 서일본에서 이적해 온 것은 2000년도이다. 2001년에는 부상의 원인인 O자형 다리의 수술. 쿠니치카 본인도 세코 감독 이상으로 결과를 내고 싶었다. 4년 전의 이 대회에서 2시간10분10초를 내면서 일본 선수 3번째인 6위로 입상. 그 후에 2시간10분을 마크하면서 세계기록에 도전하기 위해 다시 한번 결심을 했다.
「마라톤에 전념하고 싶다. 그것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뜻대로 연습을 하고 싶다.」
쿠니치카는 스스로의 희망으로 3년 전 에스비 식품으로 이적해 왔다. 그 후에 육상부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 결정되었지만 당시의 이 선택은 NTT 서일본 육상부 관계자에게 있어서 결코 기분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반대를 물리치고 스스로 새로운 환경을 선택한 이상 변명은 있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결과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부상도 있었지만 다시 일어서서 좋은 컨디션으로 임했던 2002년의 후쿠오카 국제마라톤은 실패로 끝났으며 2시간15분19초의 좋지 않은 기록으로 8위에 그쳤다. 설욕을 노리고 3개월 후에 출전한 03년 비와코에서도 2시간10분48초로 8위. 본인의 최고 기록은 NTT 서일본 시절과 똑같다.
30살. 이제 결과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세코 감독은 이번에는 지금까지의 쿠니치카와 달랐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차분했습니다. 지난번에는 10일 정도 전부터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적한 것도 있어서 결과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초조함도 있었던 것 같지만 이번에는 본인이 자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실패한 경험을 살린 것 같습니다. 쿠니치카는 제가 말하는 것을 잘 들어주며 저도 생각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전 대회의 실패는 마지막 조정이 빨라서 레이스에서는 최고의 컨디션이 지났던 것에 원인이 있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이번에는 4주 전부터 1주일 정도 미야자키에서 합숙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곳에서 전력을 다해서 달리는 것으로 의식적으로 마지막 조정을 늦출 수가 있었다. 그리고 레이스에서의 작전에 대해서도 선수는 감독의 지시를 따른다.
「40km 까지는 욕심을 내지 말아라. 쓸데없는 힘을 사용하지 말고 앞에 나가지 말아라. 만약에 40km까지 따라가서도 여유가 있다면 욕심을 내어서 승부를 걸어라.」
현역시절 항상 마지막에 승부를 내었던 감독의 전법을 선수에게 전수하고 있다. 쿠니치카는 그대로 레이스를 했다. 그것이 아테네 올림픽 대표선수의 티켓으로 이어졌다. 앞으로 8개월 정도 연습을 할 수 있다.
감독은 현역시절 올림픽에서 정상에 설 기회가 3번 있었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는 일본의 보이콧으로 "환상의 대표"가 되었으며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는 조정에 실패,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연습 때부터 페이스가 올라가지 않아서 실전 경기에서는 승부를 낼 기술이 없었다. 3번의 기회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올림픽의 한을 풀 기회를 겨우 잡은 것이다. 세코 감독과 쿠니치카의 올림픽 여정이 지금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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