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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선수분석]파리 마라톤 은메달 노구치 미즈키

게시일 : 2003-10-31 | 조회수 : 4,949

추적/파리세계선수권
여자마라톤 은메달 리스트 노구치 미즈키 (glob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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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서린 테레바(케냐)에게 금메달은 빼앗겼지만 2위부터 4위까지 일본 여자마라톤 선수가 차지. 2시간 24분 14초로 은메달을 획득한 노구치 미즈키.(globally) 일본육상연맹이 정한「메달을 따고 일본선수 중에서 톱」이라고 하는 조건을 만족시키면서 내년 아테네올림픽 대표선수로 내정 되었다. 올림픽 대표선수는 한 나라에 3명.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다카하시 나오코(스카이넷 아시아 항공)도 지금부터 열리는 국내예선전을 통과하지 않으면 대표선수가 될 수 없는 좁고도 높은 문. 그 티켓을 딴 노구치 미즈키의 안착은 놀랄 만하다. 1월 오사카 국제여자마라톤에서 2시간 21분 18초의 좋은 기록(일본역대 2위)을 마크하고 우승. 이번 세계선수권의 대표가 되었을 때부터 후지타 노부유키 감독은 아테네 올림픽까지의 계획을 세웠다.

와코루 시절에 아끼던 제자였던 마사키 이즈미-현 야마오카는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서 12위. 이번에만은 메달을「파리대회에서의 은메달은 통과점」이라고 10월 4일 63세의 생일을 맞은 명장은 생각하고 있다.

올림픽 티켓 뒤에 숨겨진「주도 면밀한 팀 전략」과 후지타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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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올림픽 대표선수는 파리에서 결정한다.
3월 나고야 국제여자 마라톤 대회가 끝나고 파리 세계선수권 대표 5명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후지타 감독은 히로세에게 말했다.

「이번 (올림픽)선발전이 가장 유리할 지도 모른다. 」여자마라톤의 대표는 작년 11월 동경국제마라톤에서 마츠오카 리에(텐마야)가 결정되었으며 노구치와 같은 오사카에서 치바 마사코(토요타 자동직기), 사카모토 나오코(텐마야)를 포함한 상위 세 명. 그리고 마지막의 나고야에서 오미나미 타가미(UFJ은행)가 들었다. 당초 이 대회에서 올림픽 티켓을 노리고 있던 다까하시도 시부이 유코(미츠이 스미토모 해상)도 부상으로 선발전 레이스를 포기. 세계선수권 대표의 면면을 보면 스피드에 있어서 노구치보다는 조금 더 낫다.

아테네 올림픽 대표 선발전은 파리 세계 선수권과 동경, 오사카, 나고야의 국내대회. 그 경기에서 세 명. 후지타는 「이 대회(세계선수권)에서 결정되지 않으면 가능성이 낮다.) 」고 생각할 정도. 파리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대표선수로 결정된다면 남은 세 개의 레이스에서 두 사람을 선발하는 대혼전. 8월에 파리에서 마라톤을 달리면 11월 동경은 뛸 수 없다. 자연히 내년에 열리는 오사카나 나고야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어떻게 해서든 파리에서 아테네 올림픽 티켓을 따고 싶다.」노구치 자신도 그리고 코치들도 그 하나만 생각하고 행동을 했다. 목표는 명료하고 간단하다. 금, 은, 동 중에 하나의 메달을 따야 된다. 그리고 일본선수에게 지지 않는 것. 이번에는 기록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2002년 나고야 국제마라톤에서 처음으로 풀 마라톤을 뛴 노구치는 2시간 25분 35초로 우승(당시 일본 역대 7위). 파리행을 결정한 이번 1월 오사카가 2번째. 2번의 레이스 모두 중국 운남성의 곤명에서 50일 가까이 고지 훈련을 했다. 같이 간 선수가 히로세. 노구치의 마라톤 2전 2승 뒤에는 히로세의 존재가 숨어 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제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로세는 아틀란타 올림픽 전의 나고야에서 첫 마라톤을 뛴 마사키의 곤명 합숙훈련에도 동행했다.

파리세계선수권에 맞추어서도 후지타는 당초 곤명에서의 합숙을 생각했다. 겨울과 여름의 레이스의 차이는 있지만 연습 코스를 알고 있으며 연습성과도 있다. 어느 정도로 달리면 어느 정도의 상태가 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별로 멀지 않아서 감독자신이 왔다 갔다 하기에도 쉽고 선수와 코치도 한번 귀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스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합숙을 포기해야 했으며, 합숙지를 찾기 위해 서둘러 히로세를 유럽에 파견. 곤명보다 100m 낮지만 표고 1800m의 스위스 생 모리츠에서 장기합숙을 하게 되었다. 노구치는「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될 각오. 현지에서의 E메일에는「하이디 보다 더」를 외치고 있다.

파리 경기는 8월 31일. 역산해서 훈련 스케줄을 짠 다음 일본을 출발한 것이 6월 10일. 이번에도 히로세가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지금까지 보다 더 긴 원정이 된다. 생 모리츠까지는 츄리히 경유로 20시간 정도. 그 긴 여행을 생각하면 일찍 가서 시합을 준비하는 것이 최선. 큰 사고가 없는 한 귀국은 없다고 가정하면 9월 3일 일본에 돌아오기 까지 85일.「이제 돌아가야지.」라고 히로세는 내심 생각했다.

후지타가 아직 어린아이가 있는 히로세의 가족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신도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감독생활을 해 오고 있다. 아이가 어렸을 때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집에 돌아가면 자신의 아이가「아빠 언제 돌아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한 슬픈 기분을 생각하면 히로세에게 3개월이나 집을 비우게 하는 것은 미안하다. 그렇다고 도중에 코치를 교체하면? 모처럼 착실하게 쌓아온 선수와의 신뢰관계가 끊어지지 않을까? 과거 2주의 곤명 합숙훈련으로 노구치와 호흡은 잘 맞았다.
감독은 히로세 도와줄 수 있지?」라고 20년 동안 알아 온 “제자”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다.

감독과 코치의 20년의 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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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세는 후지타와 25세의 나이 차이로 1965년 생. 효고현 니시와키 공고에서 단거리 선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역전에서 처음으로 전국 재패를 하였을 때 응원 부대였다. 3-4구간에서 소리 높여 응원한 기억이 있다. 단거리 선수라도 해도「400m가 51초대」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84년에 고등학교 졸업. 유니치카에 취직 했으며 교도 우지공장에 배속되었다. 그곳에서 후지타와 만났다. 교토 라꾸후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지타는 재수중인 59년 가을「관서 실업단 역전에 나갈 멤버가 부족하다.」는 권유로 당시의 일본 레이욘(현 유니치카)에 입사했다. 68년부터 코치가 되었으며 히로세가 입사한 84년 8월에는 오사카 본사근무에서 일단 우지공장으로 이동했다고는 해도 동호회에 중에 실력이 조금 낳았던 육상부는 여자 중장거리가 主. 남자는 히로세 뿐이며 근무는 오전 8시 15분부터 저녁 5시까지의 풀 타임.

당시 카시와기 치에미라고 하는 마라톤 선수가 있어서 히로세는 카시와기를 따라서 자주 연습을 했다.「들어갔을 당시에는 체중이 65kg정도로 카시와기와 같이 400m 인터벌을 하면 예정의 20개를 다 소화하지 못하고 12-13개에서 그만두었다. 80초 정도의 설정이었습니다.」히로세가 당시를 생각하면서 웃는다.

후지타도「뚱뚱해서」라고 큰소리로 웃으면서 보충설명을 한다. 다음해 85년 말에는 처음으로 호후에서 마라톤을 달려서 2시간 22분 49초. 1년 후에는 후쿠오카에서 2시간 20분 09초로 단축시켰다. 당시 그것이 동경부의 최고기록으로 그 지방에서는 화제가 되었다. 히로세는 통산 11회 마라톤을 달렸으며 마사키가 아틀란타 올림픽에 출전한 96년, 북해도의 벳카이에서 2시간 18분 15초로 본인의 최고기록을 세웠다. 마사키의 연습을 점차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후지타는 그 후 86년 4월에 유니치카를 퇴사. 같은 해 6월에 여자 육상단을 설립한 와코루에 들어갔다. 우지강의 제방을 혼자서 달린 히로세는 가끔 후지타의 충고를 들으면서 연습을 계속하고 있었지만「다른 곳에서 하지 않으면 무리인가」라고 혼자서 하는 연습의 한계를 느끼고 87년 여름 리츠메이칸 대학에 입학. 고등학교 시절에는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든「역전」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전일본대학 역전에는「일단 에이스로」(히로세) 4년간 출전. 2학년부터 4학년 때까지는 릴레이 마지막 주자를 했으며, 3학년 때 구간 7위가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 사이에도 후지타와 계속 연락을 하면서 대학교 4학년 여름부터는 와코루 코치를 하게 되었다. 그대로 졸업한 후에는 와코루에 코치로 들어갔다. 대학교 3학년 때 호후 마라톤에서 2시간 19분 36초의 기록을 가지고 있어서 관심을 가져준 실업단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실업단에서 계속 뛸 만큼의 힘은 없다고 자신의 선수로서의 장래성에 회의를 가지면서 포기했다.」

파리세계 선수권에 도전하는 노구치를 뒤따라 가는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중에서 히로세는 「자신이 달성하지 못했던 꿈을 선수들에게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것을 본 후지타도 「저와 똑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군요.」라고 털어놓았다. 고등학교 시절 1500m에서 긴키지역 대회에 나갔을 정도의「이류선수」(후지타)였던 감독은 올림픽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지도자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한 것이 뮌헨 올림픽 전인 71년. 800m에서 2분 05초 1의 일본최고기록을 세운 카와노 노부꼬가 아직 2시간 10분대를 세우지 못했던 시절이지만 환갑을 넘긴 지금도 아직 당시의 열정은 잊을 수 없다.

「74년에 처음으로 유럽에 40일간 데리고 갔지만, 이제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한 그 때의 감격과 놀라움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선수로서의 성적은 거의 없지만 후지타는 그 후 트랙 중장거리 종목에서 차례차례 일본기록 보유자를 배출. 첫 올림픽 출전선수는 92년의 바르셀로나 대회에 10000m에 출전한 마사키다.

생 모리츠에서의 고지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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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치의 마라톤 트레이닝은 후지타와 히로세가 같이 계획을 한다. 이번 생 모리츠에서 합숙에 들어가고 나서의 연습을 예로 들어보면 처음 1개월은「다리 만들기와 끈기 만들기」페이스는 느려도 상관없으므로 우선 긴 거리를 달리거나 오르막 내리막을 달린다. 알프스의 산이 있는 곳에서는 아침 연습 때부터 기복이 있는 코스를 달려도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구체적으로는 2시간 반의 조깅과 40km주. 합숙초반에 한번「50km주」를 넣었는데 20km부근부터 비가 심해져서 40km에서 포기한 적이 있다. 7월에 들어서는 서서히 페이스를 올리는 연습을 했다.

전반의 연습 35일을 끝낸 지점에서 7월 16일부터 23일까지 파리 코스를 사전답사. 이것이「기분전환」이 되었다. 생 모리츠에서 매일 세끼를 전부 호텔에서 먹어서 일본 음식은 한번도 먹지 못했다. 다행히 노구치는 무엇이든지 잘 먹는다. 「밥이 없으면 힘들다」고 하는 선수가 아니므로 어디에 가더라도 적응할 수 있다. 「식욕이 왕성해서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마라톤 선수로서는 큰 자질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먹는 일본음식은 상당히 기쁜 일이다. 파리에서 후지타와 합류한 노구치는 웃는 얼굴로 참치 회를 먹었다. 돌길이 많고 오르막 내리막이 심하다고 알려진 코스였지만 코스를 실제로 달리면서 사전답사를 하는 것은 어렵다. 「이런 느낌」이라고 하는 느낌만을 가지고 나머지는 합숙의 기운 회복 효과를 기대하는 파리 체류였다.

그 사이에 후지타는 코스의 20km 부근에 실전용 합숙을 예약. 일본식 음식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가게를 찾아서 파리에서의 생활을 계획했다. 당일은 오토바이로 코스를 먼저 답사하고 싶어서 통역하는 사람을 통해서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는 운전수도 구했다. 이 사람이 일본어를 할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시험주행을 끝내고 생 모리츠에서 돌아 온 후부터 연습의 후반전. 「그렇게 해서 전반, 사전답사, 후반이라는 틀 안에서 부분마다 나누어져 있어서 합숙은 장기간이지만 생각만큼 정신적으로 고생한 기억은 없었던 것 같다.」라고 히로세는 말한다. 자신도 그렇지만 노구치도 초조하게 생각하거나 일본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변화는 없었던 것 같다.

그 때 노구치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연습도 그렇다. 시작하면 절대로 우는 소리나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합에서 실패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결과로 이어진다. 무서운 것은 부상뿐이다.

「합숙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부상의 위험은 커지며 마지막까지 걱정이 되는 부분이다.」일본에 남아서 히로세에게 연습의 정보를 듣고 있는 후지타는 항상 마음을 조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포인트 연습을 하는 날을 알고 있었다.「오늘 연습을 무사히 마쳤습니다.」라고 히로세가 전화를 한다. 그것은 다행이지만 다음날 아침 다리가 아프지는 않을까? 시차도 있으므로 보고가 기다려진다. 후지타는 「무사히 아침 연습을 했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후에야 한숨을 돌리게 된다.

시험 주행에서 돌아오고 연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그런 날이 더 많아 진다. 7월 31일에는 후지타도 생 모리츠에 왔다. 8월7일에는 마지막 40km주. 그것을 본 다음 후지타는 일단 귀국. 순조롭게 연습을 소화해서 노구치의 컨디션도 좋다. 남은 것은 평상시에 다름없이 2주일 전에 20km주로 마지막 상태를 체크 하는 것. 그 20km주가 8월 16일. 히로세는 「움직임을 보고『오사카 경기 때와 다름없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그 때를 회고하고 있다. 장소도 표고도 틀리므로 시간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상태는 상당히 좋다. 노구치는 고지 적응능력이 뛰어난지 익숙해지면 짧은 인터벌에서는 평지와 같은 기록으로 달린다.

파리에 간 것이 8월 20일. 마지막 마무리는 좋았지만 히로세는 아직 안심이 되지 않았다. 레이스 까지는 11일이 남았다. 출발선에 설 때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막다른 곳에서 실패하는 경우는 많이 있다.
후지타는 영양사와 매니저를 데리고 2일전에 일본에서 파리에 도착했다.
생 모리츠에서 두 사람이 오기 전에 밥을 지어서 시식을 해 보았다.
「처음에 산 쌀은 퍼석퍼석해서 다른 쌀을 사러 갔었습니다.」후지타는
잘되라고 생각하는 일은 무엇이든 철저하게 지킨다.
히로세와 노구치가 생 모리츠 합숙을 끝내고 파리로 온 그날 밤 저녁 식사는「장어에 생선 계란 야채 등을 얹은 밥」이었다.

트랙의 연장선상에 있는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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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이틀 전의 8월 29일에 세계선수권 여자마라톤 대표 다섯 명이 기자회견을 했다. 노구치는 확고한 표정으로「여기까지 오기까지는 길고도 빨랐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특히 코칭스텝들의 지지에 큰 감사를 드립니다.」그도 그럴 것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노구치를 도와주었다. 오랜 기간 유럽에서 합숙을 하게 해준 회사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노구치 혼자가 아니라 팀에서 딴 은메달입니다.」
히로세는 자화자찬을 그렇게 말하지만 이것은 선수 본인도 잘 알고 있다.

노구치와 마라톤 연습을 같이 한 것이 지금까지 3번. 모든 레이스에서 성적을 내었다. 히로세는「안심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는 올림픽이 걸린 레이스였기 때문에. 가족의 걱정도 있었지만 충실감은 컸다. 후지타의 중매로 결혼한 기미요 부인은 고지의 야마다 고등학교 츄우쿄우 여자대학교를 나온 선수출신. 남편의 일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가장 잘 알아 줄 것이다. 노구치를 철저하게 마크하기 위해 출전한 함봉실(북한)의 바로 뒤에서 따라 뛰며 중간 중간에 보기 흉한 장면도 여러 번 있었다. 만약에 그 때 초조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면 상대가 생각했던 계획대로 되었을 것이라고 후지타 감독은 말한다. 「30km 지점까지 참고 달리자고 여러 번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노구치는 선두집단 중에서도 앞쪽의 위치를 유지. 그러나 데레바의 도전에는 대적할 수 없었다.」

「그것이 2시간 20분을 3번 세운 선수와 최고기록이 2시간 21분인 선수와의 차이가 아닐까?」 후지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번에는 출전하지 않았지만 세계기록 보유자인 폴라 래드클리프(영국)도 지금의 노구치는 적수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히로세가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은 10,000m에서 3위에 입상한 쑨 인지에(중국). 이디오피아 세력에 금, 은을 빼앗겼지만 30분 초반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시아 챔피언인 쑨 인지에 선수다. 「10000m 다음 날, 노구치를 데리고 보조트랙에 갔었는데 쑨 인지에 선수가 뛰고 있었다. 5000m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노구치가 연습하기 전부터 시작해서 연습을 마친 후에도 그 때까지 아직 달리고 있었다. 그 힘은 가히 위협적이다.」

후지타는 쑨 인지에 선수가 다음 올림픽에서 어떤 종목에 출전할 지 신경이 쓰인다. 쑨 인지에 선수의 살짝 땅에 스치는 듯 하는 주법과 노구치의 탄력을 이용한 주법은 대조적이다. 후지타는 노구치가 마라톤을 시작했을 때 몇 사람에게 같은 이야기를 했다.

「저렇게 달리면 30km이후에 견딜 수 있을까? 좀 더 정밀하게 달리지 않으면」웃으면서 듣고 있었지만 마라톤을 하기 때문에 폼을 바꾸려고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마라톤만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이상하다. 이상은 트랙의 연장선에 마라톤이 있어야 될 것이다. 최근의 스피드 마라톤의 경우에는 한층 더 그럴 것이다.」트랙종목에서 많은 일본신기록을 세운 후지타의 자부심이 있다. 확실하게 노구치의 주법으로는 위험할 것이다.

42km 정도를 달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다리의 근력이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웨이트 트레이닝은 매일 하고 있으며 생 모리츠에서도 그러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곳이 조건이엇다. 웨이트라고는 하더라도 기계를 사용하는 트레이닝 만이 아니라 자신과 코치의 체중을 이용하는 등 연구를 하면서 했다.

「처음 나고야에서 마라톤을 달리기 전의 연습에서는 40km주를 할 때에도 마지막까지 코치가 끌어주었습니다. 2회째인 오사카에서는 30km까지 끌어 주고 나머지 10km는 스스로 페이스를 올렸다. 이번에는 마지막 40km주를 해 보았는데 계속 혼자입니다. 자신이 붙었다고 생각합니다.」
후지타는 지난 일을 이야기 하고 있다. 생 모리츠에서는 야외의 지형을 이용해서 아침부터 기복이 많은 곳을 달렸다. 「곤명에서는 불가능한 연습」히로세도 스케줄에 넣으면서 노구치는 경치가 수려한 자연 속에서 다리근력을 강화시켰다.

아테네 올림픽 대책은 우선 정보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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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다 먼저 아테네 올림픽 대표선수로 결정된 노구치는 세계 하프마라톤 선수권(10월 4일, 포르투갈)의 대표로 선발되어 있었지만 포기했다. 귀국해서 바로 나고야에 있는 글로벌 본사에 인사를 하러 갔으며 미에현의 출신교(초, 중, 고)에도 갔다. 그곳에서 기분을 바꾸어 세계 하프마라톤을 준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본인에게는「나가고 싶은」마음도 있었지만 감독이 만류했다. 내년 여름 레이스에 맞추어 계획 만들기는 지금부터이다. 겨울의 선발전은 생각하지 않고 실전만을 보고 스케줄을 세울 수 있는 것이 남보다 빨리 대표선수에 결정된 최대의 강점이다.

「우선 경쟁에 있어서 정보수집이 가능합니다. 경쟁하기 위한 본거지를 찾거나 합숙지를 어디로 할 것인지 등. 아테네는 더우므로…」
올림픽의 주목도는 세계선수권과 비교할 수 없다. 그것에 맞춘 후지타의 면밀한 지휘가 시작된다. 트레이닝에 대해서는 아직 미정이지만 계획의 한단계만 알려주었다.

「사스의 문제가 재연되지 않는다면 중국에서 우선 초기의 페이스 만들기를 한 다음 일본에 돌아와서 기운을 회복시키고 나서 유럽에 가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생 모리츠가 후보지가 될지. 그러나 그곳에서 바로 아테네로 가면 더위로 고생을 하게 되므로 더위에 익숙해 질 수 있는 중간지역이 필요합니다.」
기온 20도 정도의 생 모리츠에서 갑자기 40도의 아테네가 아니라 30도 정도의 지역에서 “더위 적응”. 파리의 레이스가 생각보다 서늘했으므로 더운 지역에서의 레이스는 또 다른 대책이 승부의 열쇠이다.

800m의 카와노를 데리고「올림픽에 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가슴 졸이고 기대한 지가 언 30년 이상. 63세인 후지타는 지금 가장 긴 거리에서 그 정점에 올라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쏟아 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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